안녕하세요, 태오입니다. 오늘은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이라는 표현을 들여다보겠습니다. 1963년에 나온 이 말은 지금도 뉴스 댓글과 조직 문화 강연에 인용됩니다. 다만 인용되는 뜻이 원래 뜻과 다르고, 나중에 공개된 사료는 이 표현이 붙었던 인물마저 흔들었습니다. 무엇이 무너졌고 무엇이 남았는지 나눠서 정리해 보겠습니다.
그 말이 나온 자리
1961년 4월 11일, 예루살렘 지방법원에서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이 시작됐습니다. 아이히만은 나치 친위대(SS)에서 유대인 이송 실무를 총괄했던 인물로, 1960년 아르헨티나에 숨어 살다 이스라엘 정보기관에 붙잡혀 법정에 섰습니다. 공판은 그해 8월 중순까지 이어졌습니다.
한나 아렌트는 잡지 뉴요커의 특파원 자격으로 이 재판을 취재했습니다. 기사는 재판이 끝나고 한참 지난 1963년 2월과 3월에 다섯 차례로 나뉘어 실렸고, 같은 해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서』라는 단행본으로 묶였습니다. 이듬해 증보판이 나왔습니다.
아렌트가 법정에서 본 것은 괴물이 아니었습니다. 상투적인 관공서 표현을 반복하고, 자기 경력의 승진 이력을 자랑스러워하고, 스스로를 명령을 이행한 성실한 실무자로 설명하는 중년 남자였습니다. 여기서 나온 표현이 '악의 평범성'입니다.
세 갈래로 어긋난 오독
이 표현은 출간 직후부터 논쟁의 한복판에 있었지만, 정작 대중적으로 굳어진 뜻은 세 지점에서 원문과 갈립니다.
첫째, 'banal'을 '흔하다'로 읽는 오독입니다. 이 단어의 뜻은 진부함, 상투성에 가깝습니다. 아렌트가 평범하다고 말한 대상은 그런 사람의 수가 아니라 그 사람이 내놓는 동기의 얄팍함이었습니다. 세상에 아이히만이 널려 있다는 통계적 주장이 아니라, 이 정도 규모의 범죄를 저지른 자의 내면에 그에 걸맞은 깊이가 없더라는 관찰이었습니다.
둘째, 면죄부로 읽는 오독입니다. '누구나 그 자리에 있었으면 그랬을 것'이라는 문장은 아렌트의 결론이 아닙니다. 그는 책의 에필로그에서 스스로 판결문을 써 보이며, 아이히만이 교수형에 처해져야 한다고 적었습니다. 동기가 얄팍했다는 진단과 죄가 가볍다는 판단은 아렌트에게서 한 번도 이어진 적이 없습니다.
셋째, 이론으로 읽는 오독입니다. 아렌트 본인이 여러 차례, 이것은 악에 관한 이론이나 교리가 아니라 한 재판정에서 목격한 것에 대한 보고라고 선을 그었습니다. 1963년 7월 24일 게르숌 숄렘에게 보낸 편지에는 이런 문장이 있습니다. 악은 결코 근본적(radical)이지 않고 다만 극단적(extreme)일 뿐이며, 깊이도 악마적 차원도 갖지 않는다는 것. 표면에서 곰팡이처럼 번지기 때문에 온 세계를 뒤덮을 수 있다는 것. 깊이가 없다는 진술이 위험이 작다는 진술의 반대편에 놓여 있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사료가 뒤집은 것
여기까지가 오독의 문제라면, 그다음은 사실의 문제입니다.
아이히만은 아르헨티나 도피 시절인 1956년부터 1957년 사이,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빌럼 사센이라는 인물과 긴 인터뷰를 했습니다. 사센은 네덜란드 출신으로 무장친위대에 복무했고 훗날 홀로코스트 부정론에 가담한 언론인입니다. 나치의 만행이 과장됐다는 자료를 만들려는 기획이었고, 아이히만은 그 자리에서 경계를 풀었습니다. 녹음은 약 70시간에 이르렀고, 전사본은 1천 쪽을 훌쩍 넘습니다.
거기에 있는 아이히만은 법정의 아이히만과 다릅니다. 명령을 따랐을 뿐이라고 말하지 않고, 자신이 한 일의 규모를 자랑에 가깝게 회고하며, 더 철저하지 못했음을 아쉬워합니다. 성실한 관료가 아니라 확신에 찬 이념가의 목소리입니다.
문제는 이 자료가 재판에서 온전히 쓰이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사센은 재판 몇 달 전 전사본 발췌를 잡지 라이프에 팔았고 그 존재는 알려져 있었지만, 예루살렘 법정은 진정성을 확인할 수 없다는 이유로 전사본을 증거로 채택하지 않았습니다. 검찰은 대신 생존자 증언으로 공소를 세웠습니다. 원본 녹음테이프의 행방은 1990년대까지 묘연했고, 음성이 대중에 공개된 것은 2022년의 다큐멘터리를 통해서였습니다.
독일 철학자 베티나 슈탕네트는 이 자료를 파고들어 2011년 독일에서 『예루살렘 이전의 아이히만』을 냈고, 영어판은 2014년에 나왔습니다. 그의 결론은 분명합니다. 예루살렘의 무해한 실무자는 성격이 아니라 법정 전략이었으며, 아이히만은 재판을 앞두고 자신을 어떻게 보이게 할지 계산한 연기자였다는 것입니다.
무너진 것과 남은 것
이 지점에서 논의를 뭉뚱그리면 오히려 흐려집니다. 두 층을 나눠 보겠습니다.
| 쟁점 | 지금 어떻게 되었나 |
|---|---|
| 아이히만은 사유하지 않는 관료였는가 | 사센 자료 앞에서 유지되기 어렵습니다. 그는 이념을 가진 자였습니다 |
| 아렌트는 충분히 관찰했는가 | 논쟁 중입니다. 아래 참고 |
| 악에 깊이가 필요한가 | 인물 판정과 별개로 여전히 살아 있는 물음입니다 |
| '평범성'이 면죄부인가 | 원문에서도, 지금도 아닙니다 |
두 번째 줄은 조금 더 설명이 필요합니다. 역사학자 데이비드 세자라니는 아렌트가 아이히만의 증언을 직접 본 것은 길어야 나흘 정도이고 나머지는 녹취와 속기록에 의존했다고 지적했습니다. 반대편에서는 아이히만이 증인석에 선 1961년 6월 20일부터 23일까지 아렌트가 법정에 있었다는 재구성을 들어, 증언을 본 적이 없다는 식의 주장은 과하다고 반박합니다. 정확한 일수는 아직 정리되지 않은 사안이고, 어느 쪽이든 그가 재판 전체를 지켜본 것은 아니라는 사실은 남습니다.
세 번째 줄이 이 글에서 가장 중요한 대목입니다. 아이히만이라는 사례가 무너져도, 깊은 동기 없이도 거대한 해악이 조직될 수 있는가라는 물음 자체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다만 그 물음을 계속 붙들려면 근거를 아이히만이 아닌 다른 데서 다시 구해야 합니다. 사례가 틀렸는데 결론만 들고 다니는 것은 학문이 아니라 관성입니다.
밀그램으로 옮겨붙은 오독
아렌트의 표현은 곧바로 심리학으로 건너갔습니다. 스탠리 밀그램은 1963년 복종 실험 결과를 발표했고, 훗날 자신의 저작에서 아렌트의 개념이 진실에 가깝다고 평가했습니다. 평범한 사람이 권위의 지시에 따라 타인에게 전기 충격을 가한다는 그림은, 평범성 논제의 실험적 증거처럼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런데 이 해석도 최근 이십여 년 사이에 흔들렸습니다. 알렉산더 헤이즐럼과 스티븐 라이커를 중심으로 한 연구진은 예일대에 남아 있는 밀그램의 원자료와 녹음을 다시 검토해, 참가자들이 맹목적으로 복종한 것이 아니라는 해석을 내놓았습니다. 이들이 제시한 개념이 '몰입된 추종(engaged followership)'입니다. 참가자는 자기 판단을 끄고 명령을 수행한 것이 아니라, 실험자가 대표하는 과학이라는 대의에 스스로를 동일시했고 그 대의에 기여한다고 믿는 만큼 계속했다는 것입니다.
이 해석에도 반론이 있습니다. 2018년에는 몰입된 추종만으로 실험 결과 전체를 설명하기는 어렵고 여러 순응 기제가 함께 작동했다고 보는 반박이 나왔습니다. 여기서도 정리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방향입니다. 아이히만 쪽에서든 밀그램 쪽에서든, 사료와 원자료로 되돌아가자 같은 결론이 나왔습니다. 텅 빈 채로 명령을 수행한 사람이라는 그림이 실제 기록과 잘 맞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개인적인 의견
저는 이 재검토가 아렌트를 무너뜨린 사건이라기보다, 그의 표현이 사람들에게 어떻게 쓰였는지를 드러낸 사건이라고 봅니다.
'악의 평범성'이 그토록 널리 퍼진 이유는 그것이 정확해서가 아니라 편해서였다고 생각합니다. 가해자가 아무 생각 없는 톱니바퀴였다면,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사람이 아니라 구조가 됩니다. 구조를 경계하는 일은 중요하지만, 그것만 남기면 확신을 가지고 해악에 가담하는 사람이 시야에서 사라집니다. 사센 테이프가 보여준 것이 정확히 그 자리에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몰입된 추종이라는 개념은 더 불편한 물음을 남깁니다. 명령이라 어쩔 수 없었다는 변명보다, 좋은 일이라 믿고 열심히 했다는 진술이 실무에서는 훨씬 흔합니다. 조직에서 위험한 순간은 지시를 거부하기 어려울 때만이 아니라, 그 일이 옳다고 믿게 되어 스스로 앞서 나갈 때이기도 합니다. 확인 절차를 생략하는 쪽이 대의에 더 기여한다고 느껴지는 순간이 그렇습니다.
한 문장으로 정리하자면 이렇습니다. 평범성 논제에서 우리가 가져가야 할 것은 '누구나 그럴 수 있다'는 위안이 아니라, 자기 확신이 붙은 성실함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에 대한 경계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보시나요?
3줄 요약
- '악의 평범성'은 가해자가 흔하다는 뜻도, 그래서 용서된다는 뜻도 아니었습니다. 동기의 얄팍함에 대한 관찰이었고, 아렌트 본인은 사형이 마땅하다고 적었습니다.
- 1956년부터 1957년 사이 녹음된 사센 인터뷰가 공개되면서, 아이히만이 사유 없는 관료였다는 인물 판정은 유지되기 어려워졌습니다.
- 밀그램 실험도 원자료 재검토를 거치며 맹목적 복종이 아닌 대의에 대한 동일시로 다시 읽히고 있습니다. 두 재검토가 같은 방향을 가리킵니다.
참고 자료: 재판 일정과 저술 경위는 Hannah Arendt, Eichmann in Jerusalem(1963, 1964 증보판) 및 관련 백과 항목. 숄렘에게 보낸 1963년 7월 24일 편지 인용문은 해당 서한 공개본. 사센 인터뷰의 분량과 법정 채택 여부, 테이프 발견 경위는 Bettina Stangneth, Eichmann Before Jerusalem(독일어판 2011, 영어판 2014)과 야드바셈 소장 자료 설명. 아렌트의 재판 참관 분량에 대한 상반된 주장은 David Cesarani의 지적과 이에 대한 Roger Berkowitz 등의 반론. 밀그램 재해석은 Reicher·Haslam·Smith(2012), Haslam 외(2015)의 예일 아카이브 연구와 2018년 반박 논문.
